
저도 처음엔 단순한 범죄 스릴러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는 연쇄살인마가 공소시효 만료 직후 자신의 범행을 책으로 출간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는 설정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법이 더 이상 처벌할 수 없는 사람이 카메라 앞에 앉아 미소를 짓는 장면 —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불편함과 분노가 동시에 올라오면서도 끝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던 영화입니다.
공소시효가 끝난 날, 살인마는 책을 냈다
영화의 출발점은 공소시효(公訴時效) 만료입니다. 여기서 공소시효란 범죄가 발생한 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국가가 더 이상 형사 소추를 할 수 없게 되는 제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그 기간이 지나버리면 아무리 확실한 범인이라도 법적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해집니다.
영화 속 연쇄살인마 이두석은 바로 그 시효 만료 당일, 자신이 10명을 살해한 진범임을 고백하는 책을 출간합니다. 책 제목은 「내가 살인범이다」. 충격적인 것은 책 안에 사건의 디테일이 너무 정확하게 담겨 있어서, 진짜 범인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내용이라는 점이 곧 증거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이두석은 자신의 몸에 박혀 있던 총알까지 스캔 사진으로 공개하며 진범임을 증명합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느낀 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었습니다. 법 제도의 빈틈을 정면으로 이용하는 인물을 보면서, 법이 정의와 항상 같은 방향을 가리키진 않는다는 불편한 사실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실제로 한국은 2015년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했습니다(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이 영화가 그려낸 상황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더 가슴을 후빕니다.
범죄소비 — 살인마에게 팬클럽이 생긴다는 것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불편했던 장면은 사실 살인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이두석에게 팬클럽이 생기고, 팬 사인회가 열리고, 사람들이 그를 연예인처럼 좋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엔 "설마 저게 가능해?" 싶었는데, 생각할수록 마냥 픽션으로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현상을 범죄 심리학에서는 하이브리스토필리아(hybristophilia)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하이브리스토필리아란 폭력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성적 매력이나 강한 끌림을 느끼는 심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실제 사례가 없는 게 아닙니다. 영화의 모티브 중 하나로 언급되는 일본의 사가와 이스무 사건에서도, 범행을 담은 책이 실제 베스트셀러가 되고 당사자가 드라마와 광고에 출연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범죄소비(crime consumption)라는 개념도 여기서 맞닿아 있습니다. 범죄소비란 범죄와 범죄자가 미디어·출판·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상품으로 소비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두석이 노이즈 마케팅을 설계하고, 유가족에게 찾아가 사과하는 척하다 싸대기를 유도하고, 방송 토론에 나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범죄소비의 교과서적인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화가 났고, 동시에 그 화가 나는 저 자신도 그 구경거리의 일부가 된 것 같아 묘하게 불편했습니다.
- 이두석의 책 출간 한 달 만에 300만 부 돌파, 순이익 약 100억 원
- 잘생긴 외모를 기반으로 형성된 팬클럽과 팬 사인회
- 유가족 방문·방송 대면 등 계산된 노이즈 마케팅 전략
- 대중의 관심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집중되는 구조적 문제
반전 — 겉모습과 진실 사이에서 흔들리다
저도 처음엔 이두석이 진범이라는 전제 하에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중반을 넘어서면서 자신이 진짜 연쇄살인범이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인물 J가 등장하고, 저는 완전히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진범이라는 근거를 제시하는 상황에서,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지점이 영화의 가장 영리한 설계라고 생각합니다. 내러티브 트릭(narrative trick), 즉 관객이 이미 익숙해진 이야기 구조에 허점을 만들어 놓고 그 허점을 통해 반전을 끌어내는 방식입니다. 관객은 처음부터 이두석을 범인으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그 전제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몰입도가 배가됩니다.
사실 제게는 이 설정이 영화 밖 경험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말 잘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을 오랫동안 좋은 사람이라 믿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실을 다르게 말하는 걸 반복해서 목격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 — 이두석이라는 캐릭터는 그걸 극단적으로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영화적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출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에서 영감을 받아 시나리오를 썼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범인을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오래 갉아먹는지를 최형사 캐릭터를 통해 잘 보여줍니다. 17년이 지나도 편히 잠들지 못하는 형사의 모습은, 단순한 직업적 집착이 아니라 죄책감과 사랑, 그리고 정의에 대한 갈망이 뒤섞인 감정으로 읽혔습니다.
아쉬운 점과 그럼에도 볼 만한 이유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 아쉬운 쪽으로요. 중반 이후 등장하는 추격전과 액션 시퀀스들이 몇 군데 과도하게 느껴졌습니다. 현실적인 맥락에서 도저히 가능해 보이지 않는 장면들이 이어질 때, 앞서 공들여 쌓아온 긴장감이 순간 흐트러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굳이 저 장면이 필요했을까 싶은 대목이 두어 군데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범죄 스릴러 장르에서 꺼내 들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전개 속도가 빠르고, 시점 전환 연출이 짜임새 있습니다. 이두석 역을 맡은 배우의 사이코패스적 연기는 특히 토론 방송 장면에서 절정을 이루는데, 웃는 얼굴로 "죄책감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는 그 장면은 한동안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단순한 오락물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피해자 유가족들의 분노와 행동을 단순히 감정적 반응으로만 그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나름의 논리와 절박함으로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법과 감정이 충돌하는 지점이 계속 드러납니다. 이두석을 납치하려는 유가족들의 계획을 보면서 저는 "저게 잘못된 건지 맞는 건지"를 영화 내내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불편함이 오히려 이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종 누적 관객 수는 약 73만 명으로, 상업적으로도 준수한 성적을 거뒀고 이후 일본에서도 「22년 후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습니다. 범죄 스릴러로서의 기본기와 사회적 메시지를 동시에 챙긴 작품이라는 평가를 저는 지지하는 쪽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내가 살인범이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직접적인 실화 기반은 아닙니다. 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보고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범행을 책으로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설정은, 일본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들에서 유사한 전례를 찾을 수 있어 완전한 픽션이라고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Q. 공소시효가 폐지됐는데 지금도 이런 일이 가능한가요?
A. 한국은 2015년 형사소송법 개정을 통해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따라서 영화 속 상황은 현행법 아래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영화는 그 법 개정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법이 바뀌기 전에 이미 시효가 종료된 사건들은 소급 적용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Q. 반전이 예측 가능한 편인가요?
A. 이 부분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일부 복선은 영화를 주의 깊게 보다 보면 눈치챌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제 경우엔 중반까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다가, 핵심 반전 장면에서 실제로 소리를 삼켰습니다. 범죄 스릴러를 많이 본 분이라면 일부 구조는 익숙할 수 있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반전만큼은 대부분 예상하기 어렵다는 평이 많습니다.
Q. 일본 리메이크 「22년 후의 고백」은 원작과 많이 다른가요?
A. 기본 설정과 구조는 원작을 충실하게 따라갑니다. 다만 일본 사회의 맥락과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 차이로 분위기는 꽤 다르게 느껴진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원작을 먼저 보고 비교하며 보는 것도 흥미로운 감상 방법이라고 봅니다.
결론
「내가 살인범이다」는 범죄 스릴러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법의 빈틈, 범죄소비 현상, 피해자 가족의 고통이라는 세 가지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만약 실제로 공소시효가 끝난 살인범이 저렇게 행동한다면, 사회는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 붙들고 있었습니다.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이라서, 오히려 그게 좋았습니다.
제 경험상 영화는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일수록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이 영화가 딱 그랬습니다. 범죄 스릴러를 좋아하는 분께도, 법과 정의의 간극에 관심 있는 분께도 추천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최형사와 이두석이 마주치는 마지막 장면 직전까지는 절대 자리를 뜨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