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평범함을 지키지 못하는 이야기. 영화 「악녀」를 처음 봤을 때 제가 느낀 건 화려한 액션보다 그 뒤에 남은 씁쓸함이었습니다. 주인공 숙희가 정말 악한 사람인지,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인지를 두고 보는 내내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단순한 복수극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저는 좀 다르게 읽었습니다.
1인칭 시점 액션 연출, 이게 왜 특별한가
액션 영화를 꽤 많이 봐온 편인데, 「악녀」의 오프닝 시퀀스는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1인칭 시점(POV, Point of View)으로 펼쳐지는 전투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POV 촬영이란 카메라가 캐릭터의 눈 위치에 고정되어 관객이 마치 그 인물의 시선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촬영 기법입니다. 할리우드 게임 원작 영화에서나 간간이 쓰이던 방식인데, 이걸 이 정도 밀도로 밀어붙인 한국 영화는 처음이었습니다.
적들이 등장하는 족족 제거되는 장면이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 자체가 액션의 일부처럼 움직입니다. 단순히 찍는 도구가 아니라 싸움의 호흡과 함께 흔들리고, 부딪히고, 달려갑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장면은 출처: IMDB - 존 윅 3 제작진이 공개적으로 오마주했다고 알려졌을 정도입니다. 키아누 리브스도 극찬했다는 후문이 있는데, 이 반응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직접 보면 납득하게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장면은 오토바이를 타면서 벌어지는 근접 칼싸움입니다. 이 시퀀스는 동시 다발적 액션 편집(cross-cutting action)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롱테이크 방식에 가깝게 연출됩니다. 롱테이크란 편집 없이 카메라를 길게 돌려 찍는 방식으로, 배우와 스턴트가 실수 없이 쭉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극히 높습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제작진이 액션 연출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느껴졌습니다.
- 오프닝 POV 시퀀스: 관객을 숙희의 시선 안으로 끌어들이는 몰입형 촬영
- 오토바이 칼싸움: 롱테이크에 가까운 연출로 긴장감을 끊지 않고 유지
- 존 윅 3 제작진의 공개 오마주: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액션 퀄리티의 증거
킬러 서사, 악녀는 처음부터 악녀였나
「악녀」를 단순히 강한 여성 킬러의 복수극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만 읽히지 않았습니다. 숙희는 어릴 때부터 폭력과 배신 속에서 살아왔고,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국가 비밀 조직의 요원으로 편입됩니다. 쉽게 말해 환경이 사람을 만든 경우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두고 "그래도 직접 사람을 해쳤으니 책임이 있다"는 의견도 있고, "처음부터 선택지가 없었던 사람을 어떻게 비난하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맴돌았던 질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시간 순서를 뒤섞어 숙희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 편집합니다. 여기서 교차 편집이란 서로 다른 시간대의 장면을 번갈아 배치해 관객이 스스로 인과관계를 조립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전개가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제 경험상 두 번째 장면쯤 지나면 오히려 이 구조가 숙희라는 인물의 복잡성을 더 잘 드러낸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숙희를 암살자로 키운 스승이자 전 연인이 죽은 줄 알았다가 다시 나타나는 설정은 막장 드라마 같다는 평도 있습니다. 솔직히 저도 처음엔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장치가 숙희의 감정선을 흔드는 방식으로 쓰이면서, 단순한 반전 요소 이상의 역할을 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경험이 얼마나 사람을 무너뜨리는지, 그게 영화 전체에 깔린 정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저도 끝났다고 생각했던 일이 다시 발목을 잡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지침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직접 겪어봐야 압니다.
모성 본능이 바꾼 싸움의 이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변화는 숙희가 아이를 갖게 된 뒤부터입니다. 이전까지 숙희는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인물에 가까웠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싸움의 이유 자체가 달라집니다.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라는 대사가 이 변화를 압축합니다. 지키고 싶은 대상이 생기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동력이 생긴다는 걸, 저도 가족이 생기고 나서 비슷하게 느낀 적이 있습니다. 혼자일 때는 그냥 넘겼을 일도,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쉽게 포기할 수 없어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보호 동기(protective motivation)라고 부릅니다. 보호 동기란 자신이 아닌 타인, 특히 취약한 존재를 지키려는 내적 충동이 행동의 주된 원동력이 되는 심리 상태를 말합니다. 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 부모 되기와 심리 변화에 따르면, 부모가 되는 경험은 위험 인식과 대응 행동에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숙희가 딸 은혜를 인질로 잡혔을 때 보여주는 반응은 이 심리를 극단적으로 시각화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영화에서 아쉬웠던 점도 있습니다. 숙희에게 불행이 너무 연속적으로 쏟아진다는 것입니다. 전 연인의 배신, 조직의 이용, 남편과의 갈등, 딸의 위기까지 쉴 틈 없이 이어지다 보니 후반부로 갈수록 "일부러 이 인물을 계속 극한으로 밀어 넣는 것 아닌가"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숙희가 평범한 삶을 원했음에도 결국 그 삶을 지키지 못하는 결말은 통쾌하기보다 씁쓸하게 남았습니다. 이 점에서 단순 오락 액션으로 가볍게 보기엔 여운이 꽤 길게 남는 영화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악녀 영화 액션이 존 윅이랑 비슷하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런가요?
A. 비슷하다기보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는 게 더 맞습니다. 「악녀」는 2017년 개봉으로 존 윅 시리즈보다 제작 시기가 비슷하거나 앞서는 부분도 있습니다. 실제로 존 윅 3 제작진이 「악녀」의 오토바이 칼싸움 시퀀스를 오마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이니, 한쪽이 다른 쪽을 베꼈다기보다 같은 시대에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한 액션 연출이라고 보는 시각이 맞을 것 같습니다.
Q. 악녀 스토리가 복잡하다고 하던데 처음 봐도 이해할 수 있나요?
A. 시간 순서를 뒤섞는 교차 편집 구조라 처음엔 다소 낯설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초반 20분만 넘기면 흐름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스토리를 완전히 파악하려고 애쓰기보다, 숙희라는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면서 보면 훨씬 몰입하기 좋습니다.
Q. 악녀가 여성 액션 영화로서 의미가 있나요, 아니면 그냥 볼거리용 영화인가요?
A. 두 시각이 모두 나올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볼거리만 보면 충분히 즐거운 영화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숙희가 왜 싸우는지, 그 이유가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따라가면서 단순한 오락 이상의 감상을 얻었습니다. 한국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원톱으로 이 정도 액션 서사를 끌어가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에서, 장르적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Q. 악녀 결말이 해피엔딩인가요?
A. 해피엔딩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숙희가 평범한 삶을 원했지만 결국 그 삶을 지키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통쾌한 복수가 이루어지는 장면은 있지만, 보고 나면 씁쓸함이 더 오래 남는 결말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영화를 해소용으로 보려는 분들께는 예상보다 무거울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결론
「악녀」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것은 결국 이 한 가지입니다. 영화 제목은 악녀인데, 정작 악한 사람이 숙희인지 그녀를 이용하고 모든 것을 빼앗은 주변 인물들인지 모호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평범한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면, 숙희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이 질문이 영화가 끝나고도 남는다는 게 이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액션 연출만 보러 가셔도 충분히 값어치를 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서 숙희의 감정선, 싸움의 이유 변화, 그리고 끝내 지키지 못한 것들을 따라가 보시면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는 두 번 봤고, 두 번째가 훨씬 더 많이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