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엑시트를 처음 봤을 때 그냥 가볍게 웃고 끝나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재난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가 뭔가 억지스럽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막상 보고 나니 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취업에 실패한 청년이 산악부 시절 익힌 클라이밍 실력으로 가족을 구한다는 이야기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 제 기억과 겹쳐서 생각보다 훨씬 깊게 남았습니다.
취업난 청년의 이야기가 재난 영화에서 통하는 이유
일반적으로 재난 영화의 주인공은 소방관이나 군인처럼 위기 대응 능력이 이미 검증된 인물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엑시트는 그 공식을 정반대로 뒤집어서 오히려 더 강하게 와닿았습니다.
주인공 이용남은 취업 준비생입니다. 가족 모임에서는 대놓고 무시당하고, 조카에게도 은근히 얕보이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이 설정이 단순히 웃음을 위한 장치에 그치지 않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용남이 산악부 출신이라는 것, 철봉 달인 수준의 체력을 가졌다는 것을 꾸준히 심어둡니다. 클라이밍(climbing)은 암벽이나 인공 구조물을 손발만으로 오르는 스포츠인데, 이게 재난 상황에서 건물 외벽을 타고 옥상과 옥상 사이를 이동하는 핵심 능력이 됩니다.
제가 주목한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용남의 클라이밍 실력이 단순히 '힘이 세다'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영화 제작 과정에서 실제 클라이밍 선수인 김자비 선수의 고증을 받아, 현실에서 선수가 실제로 시도할 수 있는 위치에 홀드(hold)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홀드란 클라이밍 벽에 박아 손이나 발로 잡는 돌기 형태의 지지대를 말합니다. 이 디테일 하나가 영화의 액션 장면에 현실감을 더해줬습니다.
저도 예전에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 쌓아온 경험들이 전부 쓸모없어진 것 같아 막막했는데, 나중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경험이 도움이 됐습니다. 용남의 산악부 시절이 취업 면접에서는 아무 쓸모 없어 보이지만 유독가스 재난 앞에서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능력이 된다는 구조가 그래서 더 크게 공감됐습니다.
- 용남의 철봉·클라이밍 장면은 와이어 없이 조정석 배우가 직접 소화한 장면이 대부분입니다
- 실제 클라이밍 선수 고증으로 홀드 위치를 설계해 액션의 현실성을 높였습니다
- 영화 개봉 이후 비상시 옥상 개방 관련 법이 실제로 개정됐습니다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 취업 실패라는 현실적 설정이 재난 영화의 클리셰를 자연스럽게 벗어나게 해줬습니다
재난탈출 장면의 연출과 숨겨진 디테일
일반적으로 재난 영화에서 관객을 지치게 만드는 요소로 두 가지가 꼽힙니다. 하나는 억지 신파, 다른 하나는 무능한 공무원이나 고위직 빌런입니다. 제가 직접 여러 재난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이 두 가지가 쌓이면 나중엔 감동보다 피로감이 먼저 온다는 겁니다. 엑시트는 그 둘을 모두 걷어냈습니다.
구조대원들은 빠르게 재난 문자를 발송하고 현장에 투입됩니다. 유독가스(toxic gas)의 해결책, 즉 물을 살수해 가스 농도를 낮추는 방법도 실제 화학 사고 대응 방식을 고증한 것입니다. 유독가스란 흡입 시 인체에 심각한 손상을 주는 독성 기체로, 실제 사고 현장에서는 물 분무로 가스를 지면으로 가라앉히거나 희석시키는 방법을 씁니다(출처: 행정안전부). 영화가 이 부분을 공무원과 소방청의 협력으로 자연스럽게 풀어낸 덕분에, 현실감이 살아있으면서도 답답함이 없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디테일은 한 번 알고 보면 영화가 두 배로 재밌어집니다. 미술 감독이 용남의 집 소품으로 양갱, 수석, 담근주 같은 소품을 직접 세팅했다는 것, 벽의 네온사인을 '호프'로 바꿔 희망을 상징하게 만든 것, 보라색 포인트 컬러가 유독가스를 만드는 두 시약이 섞일 때 나오는 색이라는 것. 이런 촘촘한 설정들이 단순 오락 영화를 한 층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용남과 의주가 먼저 구조될 수 있는 상황에서 옥상에 갇힌 고등학생들을 구해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장면은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입니다. 두 사람이 완벽한 영웅이라서가 아니라, 지치고 무서운 상태에서도 더 약한 쪽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저도 힘든 시기에 오히려 누군가를 도우면서 자신감을 되찾은 경험이 있어서, 그 장면이 유독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모스 부호(Morse code)로 SOS 신호를 보내는 장면도,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가 알파벳 'H'를 형성해 HELP를 표현한다는 설정이 나중에야 알아챘는데 그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모스 부호란 점과 선의 조합으로 글자를 표현하는 신호 체계입니다.
다만 제 경험상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을 솔직히 말하자면, 유독가스 테러범의 동기가 뉴스 보도로 짧게 처리된 점입니다. 영화가 두 주인공의 탈출에 집중하겠다는 선택은 이해하지만, 범행의 무게감이 약해지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더 설명이 있었다면 사건 자체의 긴장감이 더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엑시트에서 조정석이 직접 한 액션이 어느 정도인가요?
A. 와이어가 필요한 일부 고난도 동작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클라이밍과 달리기 장면을 조정석 배우가 직접 소화했습니다. 15m 높이 세트 등반을 3일간 직접 했고, 그 결과 실제로 어깨가 넓어졌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정도 규모의 액션은 스턴트 배우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엑시트에서는 배우 본인의 체력과 의지로 대부분 해결했다는 점에서 다른 재난 영화와 차별됩니다.
Q. 영화에서 유독가스 장면은 CG인가요, 실제인가요?
A. 대전 도로 한 구간을 실제로 통제하고 인체에 무해한 가스를 실제로 뿌린 후 CG로 보강했습니다. 탱크로리도 실제 사이즈로 제작했고, 특효 팀이 가스 분출 효과를 현장에서 구현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혼합 방식이 순수 CG보다 현장감이 훨씬 살아납니다.
Q. 엑시트 제목이 원래 다른 이름이었다는 게 사실인가요?
A. 맞습니다. 원래 제목 후보 중 하나가 '포기'였습니다. 한글 '포기'가 안개 낀 포기와 포기(抛棄)의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 감독이 야심 차게 지은 이름이었지만, 제작사에서 영화도 포기하냐는 반응이 나오면서 엑시트로 바꿨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영화 제목은 배급사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되는 경우가 많아,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살아남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Q. 영화 엑시트가 사회적으로 실제 변화를 만들어냈나요?
A. 영화 개봉 이후 비상 상황에서의 옥상 개방 관련 법이 실제로 개정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극 중 옥상 문이 잠겨 학생들이 갇히는 장면이 현실의 문제점을 짚어낸 셈입니다. 오락 영화가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문 만큼, 이 부분은 엑시트가 단순 블록버스터를 넘어선 지점이라고 봅니다.
결론
엑시트는 재난 영화라는 껍데기 안에 취업난 세대를 향한 응원을 담은 작품입니다. 제가 처음에 가볍게 봤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당장 남들 눈에 쓸모없어 보이는 경험이라도, 언젠가 정말 중요한 순간에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억지스럽지 않게 전달됐습니다.
제 경험상 이 영화는 한 번만 보는 것보다 제작 과정의 디테일을 알고 다시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미술 감독의 소품 하나하나, 배우의 애드리브, 보라색으로 통일된 컬러 설정까지. 이미 본 분들이라면 다시 보면서 놓쳤던 것들을 찾아보는 것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