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 시기에 마스크 한 장 구하려고 이른 아침부터 약국 앞에 줄을 서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사람이 조금만 불안해지면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하고. 그 기억이 있어서인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는 내내 스크린 속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선택이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재난 속 생존 본능과 계층 붕괴, 그리고 도덕적 선택이라는 세 가지 질문을 이 영화는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생존 본능 앞에서 도덕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영화는 대지진으로 서울이 통째로 무너진 뒤, 단 한 동만 살아남은 황궁아파트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주민들이 가진 생수는 총 22병, 비상전기도 없고 외부 구조도 오지 않는 상황. 이 설정이 단순한 재난 클리셰처럼 보일 수 있는데, 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코로나 당시 생필품 사재기 뉴스를 보면서 이미 비슷한 감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생존 본능(survival instinct)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극한 상황에서 자기 보존을 위해 평소의 판단 기준을 무너뜨리는 심리적 반응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배가 고프면 도덕보다 식욕이 먼저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 속 주민들이 외부 생존자를 받아들일지 투표하는 장면은 이 본능을 가장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추위에 떠는 아이를 안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보면서도, 흰 돌을 집어드는 주민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쉽게 비난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경우에도 가족이 있는 상황이었다면 어떤 돌을 집었을지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내집단 편향(in-group bias)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내집단 편향이란, 사람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구성원을 외부인보다 더 신뢰하고 우선시하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주민증을 확인하고 경비 아저씨조차 외부인으로 분류하는 장면은 이 편향이 극한까지 치달을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와 관련해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즈펠의 사회 정체성 이론(출처: Simply Psychology)에 따르면, 집단 간 경계가 명확해질수록 외집단에 대한 배타성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집니다. 영화가 그냥 만들어낸 설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박서준이 연기한 민성이 재난 초기에 남을 구하려다 얼굴에 상처를 입고서도, 결국 방범대 반장 역할을 맡아 외부인을 쫓아내는 쪽으로 기울어가는 감정선이 저는 특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착한 사람이 나쁜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극한 상황이 사람의 우선순위를 바꿔버리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 생존 본능이 발동하면 평소의 도덕 기준은 뒤로 밀린다
- 내집단 편향은 위기 상황에서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 착한 사람도 상황이 바뀌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전제다
계층 붕괴 이후, 새로운 계층이 만들어지는 방식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설정은 황궁아파트가 원래 그다지 좋은 아파트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복도식 구조에 20평대 이하, 재건축을 기다리던 오래된 아파트. 반면 외부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바로 옆 드림팰리스, 그러니까 황궁보다 훨씬 고급 아파트 주민들입니다. 재난 이전의 계층이 완전히 역전된 상황입니다.
계층 역전(social stratification reversal)이란, 기존 사회에서 통용되던 자원이나 지위 기준이 붕괴하고 새로운 기준으로 위계가 재편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돈도, 학력도, 직업도 아닌 단 하나의 기준, 바로 황궁아파트 주민 여부가 새로운 계층의 기준이 됩니다. 제가 직접 이 영화를 보면서 씁쓸하게 웃었던 순간이 바로 이 지점이었습니다. 세상이 완전히 뒤집혀도 결국 사람은 또 다른 서열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 보편성이 무섭기도 하고, 어쩐지 웃기기도 했습니다.
영탁(이병헌)이 주민 대표가 되는 과정도 이 맥락에서 읽어야 제대로 보입니다. 그가 지도자로 선택된 이유는 지식이나 재력이 아니라 불 속으로 뛰어드는 희생정신, 즉 위기 상황에서 공동체가 요구하는 덕목을 몸으로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카리스마적 권위(charismatic authority)란 막스 베버가 정의한 개념으로, 제도나 전통이 아닌 개인의 비범한 행동에서 나오는 지도력을 의미합니다. 영탁의 리더십은 교과서에 나오는 이 개념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그 권위가 점점 폭력적 배타성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이 영화의 진짜 공포입니다.
사회학자들은 집단이 외부 위협을 인식할수록 내부 결속이 강해지고, 그 결속은 외부인에 대한 적대감과 비례해 커진다고 설명합니다(출처: Encyclopaedia Britannica).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외부인을 특정 단어로 부르며 우월감을 느끼는 장면, 그리고 그 우월감이 절정에 달하는 후반부 연출은 이 이론을 영화적 언어로 가장 잘 번역한 장면이라고 봅니다.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솔직히 소름이 돋을 정도로 효과적이었습니다.
재난 이전 드림팰리스에 살던 사람이 황궁아파트 주민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장면. 저는 이게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게 여기는 계층 기준이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꼬집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꼬집음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콘크리트 유토피아, 스포 없이 봐도 재미있나요?
A. 저는 사전 정보 없이 봤는데, 그게 오히려 훨씬 좋았습니다. 영탁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처음부터 모르고 따라가는 편이 몰입감이 훨씬 높습니다. 결말 방향을 미리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꽤 크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Q. 황궁아파트가 실제로 촬영된 곳이 있나요?
A. 영화 속 황궁아파트는 실제 복도식 아파트를 세트화해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구체적인 촬영지는 공식적으로 공개된 정보가 많지 않아 단정하기 어렵지만, 배경의 현실감이 세트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는 점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Q. 박보영 분량은 얼마나 되나요?
A. 박보영이 연기한 명화는 초반보다 중후반으로 갈수록 비중이 커집니다.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이야기의 도덕적 무게를 잡아주는 역할이어서, 분량보다 존재감이 훨씬 크다고 느꼈습니다. 주연 세 명의 역할이 균형 있게 배분된 영화라는 시각도 있고, 이병헌에게 무게가 쏠린다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후자에 좀 더 동의합니다.
Q. 이 영화, 어린이나 청소년이 봐도 괜찮은가요?
A. 15세 관람가로 개봉한 영화입니다. 다만 폭력적인 장면과 심리적으로 불편한 상황이 후반부에 집중되어 있어, 감수성이 예민한 분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단순한 액션 재난영화가 아니라 불편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는 점을 먼저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결론
정리하면,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 이후 생존 본능과 계층 붕괴, 그리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선택을 한 아파트라는 좁은 공간에 압축해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았던 질문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나는 저 상황에서 어떤 돌을 집었을까.
쉽게 답하기 어렵기 때문에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재밌다는 것을 넘어서, 보고 나서도 며칠간 생각이 이어지는 영화는 흔하지 않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미리 결말 검색은 참으시고 극장이든 OTT든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